White Shadow
흰 그림자, 신준민의 광학적 표현주의
강미정(미학자)
신준민은 풍경화가다. 그는 학교 다닐 때부터 대구라는 도시 곳곳을 소요하며 그릴거리를 찾아다녔다. 처음에 화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동물원과 야구장처럼 인공적 광경이 펼쳐지는 공간이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책 중에 만난, 눈길을 잡아 끄는 풍경과 대상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샤를 보들레르의 ‘현대적 삶의 화가,’ 콩스탕탱 기처럼 익명의 개인으로서 대도시를 살아가는 작가는 정해진 목적 없이 도시를 배회했다. 때로는 굶주린 사자가 먹잇감을 찾듯, 때로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나 회복기의 환자처럼. 그러나 19세기 플라뇌르 콩스탕탱 기가 군중 속에서 덧없고 순간적이지만 진기하고 새로운 파리지앵들의 풍속을 탐색했던 것과는 다르게, 21세기 산책자 신준민은 평범하고 친숙한 풍경과의 우연적이고도 필연적인 조우를 탐닉했다. 그는 한동안 버려진 듯 황량한 공터, 인적이 없는 하천,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아파트의 공허하고 쓸쓸한 풍경을 어두운 푸른 색조에 담아냈다. 그렇더라도 콩스탕탱 기와 신준민 모두에게 거리의 배회와 그림 그리기는 불가피한 모험이었다.
신준민의 산책을 그저 어슬렁거림으로 만들지 않는 것은 그의 색다른 ‘보기’(seeing) 경험에 있다. 미술사가이자 심리학자인 언스트 곰브리치가 잘 알려준 것처럼 우리의 시지각은 감각자료의 기계적 입력이 아니라 능동적인 정신활동이다. 오늘날 신경과학은 우리 시각체계가 물체에서 반사된 빛이 망막에 맺힐 때부터 도식과 기억을 따라 무엇을 볼지 선택한다는 사실을 밝혀 주었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특정한 파장[waves]을 가진 대상이나 풍경과 조우한다. 어쩌면 이 만남은... 내가 가진 정서적 파장과 비슷한 에너지를 지닌 그 무엇들과의 만남일지도 모른다.” 그릴 것을 찾아 거리를 배회할 때 유독 작가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대상은 황량하고 슬프게 다가오면서도 그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그때 그곳에서 보고 들었던 빛과 소리는, 아니 정확히 말해 그 시각적⋅청각적 파장들은 작가의 감수성을 자극할뿐더러, 그의 기억을 소환하고 상상력을 발동시켰을 것이다.
신준민의 화면에는 인적이 드물다. 멀리 보이는 사람들은 풍경의 일부로 녹아들어 있다. 사람이 없고 쓸쓸한 신준민의 풍경은 하늘빛부터 검푸름까지 파란 색조로 뒤덮여 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주르륵 흘러내리는 푸른빛 물감이 마치 눈물 같기도 한다. 작가가 대량의 테라핀을 섞어 묽어진 물감을 즐겨 사용하는 까닭에, 그의 모든 그림에서 매체의 물리적 속성을 상기하는 물감의 흘러내림이 관찰된다. 흘러내린 물감은 다른 색과 혼합되거나 중첩됨으로써 예기치 못한 효과를 발생시키는데, 이런 우연성을 십분 활용한 그의 풍경은 외부 대상의 재현과 내적 세계의 표현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세기 후반의 독일 신표현주의를 떠올리기도 하는 반(半)추상적 대형 풍경화들은 신준민의 내면의 자화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의 말대로 그의 감수성과 주파수가 맞는 장면들의 재현이어서일까.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된 후 거리에 사람들이 없어지고 도시 전체가 적막해지자, 작가는 어둡고 쓸쓸한 도시의 공간 대신 태양빛이 눈부신 자연 공간을 찾아 나섰다. 2021년에서 2023년 사이 신준민이 그렸던 그림 중에는 물가에서 바라본 윤슬을 주제로 한 작품이 있다. 가령 < 물 빛 >(2021)이나 < 흰 빛 >(2023) 같은 것들이다. 바다에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은 화면 상단에 거무스름한 그림자처럼 암시된 반면, 수면 위 ‘흰 그림자’로 재현된 빛 방울들은 잔물결을 따라 영롱하게 반짝인다. 이즈음 신준민의 풍경은 종전의 표현주의적 재현을 떠나 인상주의적 표현으로 옮겨간 것으로 추측된다. ‘눈(eyes)의 사실주의’를 추구했던 19세기 화가들처럼 작가는 야외로 나가 햇빛을 반사하는 대상들을 그림의 소재로 삼곤 했다. 인상주의자들이 눈앞의 소재보다 그것을 비추는 빛이 더 주목했던 것처럼 신준민도 빛을 작업의 중심부로 끌어 들였다. 과거에 그렸던 도시의 쓸쓸한 풍경들에서 물감의 흐름이 쓸쓸함과 슬픔을 배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면, ‘흰 그림자’의 재현에서 흐르는 물감 자국들은 쓸쓸함, 애잔함의 정조보다는 어떤 그리움 또는 노스탤지어를 상기하는데 일조하는 것 같다. 그런가하면, 같은 시기에 제작된 < 밤 빛 >(2021)이나 < 빛 숲 >(2022) 같은 작업은 작가가 눈에 보이는 것에 천착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어둠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인공 조명과 이와 대조를 이루는 황량하고 삭막한 주변 광경은, 그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가시화에서 벗어나 있지 않음을 적시한다.
이번 개인전 《화이트 섀도우》에서 신준민은 빛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더 급진화하여 빛에 비친 대상보다 빛 그 자체의 재현에 주목한 작품들을 주로 공개했다. 그는 예전에도 불빛을 그렸다. < 야구장 > 연작을 하던 2010년대 중반 그는 특유의 표현적인 필치로 야구장의 여러 구조물들과 더불어 야간 조명탑을 그렸다. 이 시기는 조명탑, 전광판, 펜스, 관중석의 사람들을 화폭에 담으면서 어린 시절부터 찾았던 야구장의 추억을 더듬었던 때다. 2022-24년 사이 발표한 (2022), (2024) 등에서도 유사한 조명탑을 소재로 삼고 있다. 하지만 최근 작가의 시선은 기념비적 크기의 구조물보다는 빛을 뿜어내는, 또는 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조명들로 오롯이 향해 있다. 빛의 재현에 주력하다 보니, 10년 전 < 야구장 >에서는 선명했던 조명탑 구조물이 점차 희미해지고, 빛의 재현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추상적이 되어갔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눈에 띄는 대작, < 빛 꽃 >(2024)은 신준민 작가의 작업실 간유리창에 비친 햇빛의 잔영(殘影)을 그린 것이다. 빛을 재현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작가가 즐겨 그린 것 중 하나는 창문에 비친 햇빛의 흰 그림자다. 그는 2022년경부터 빛 그림자를 크고 작은 캔버스에 재현해 왔다. 그간의 < 빛 꽃 >은 빛의 잔영을 원(또는 구) 안에 있는 흰 다이아몬드 문양으로 재현한 것이다. 이와 다르게 이 대형의 < 빛 꽃 >에선 선명한 창틀과는 대조적으로 희미하게 묘사된 다이아몬드 문양이 보인다. 묵직한 창틀이 작품의 수직적 구도를 주도하고 있다면, 흐릿하게 그려진 창밖의 전깃줄은 수직선의 강렬함을 다소간 상쇄해준다.
《화이트 섀도우》전에 출품한 또 다른 < 빛 꽃 >(2024)이 있다. 언뜻 단순한 색면화처럼 보이는 이 < 빛 꽃 >도 내부에 다이아몬드 형태의 흰 그림자를 품고 있다. 실상 그림의 주제를 알지 못하는 많은 관람자들은 신준민의 < 빛 꽃 > 연작을 추상화라고 여길 것 같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 빛 꽃 >들은 모두 햇빛이나 인공 조명이 간유리에 비침으로써 생긴 잔영을 보이는 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신준민은 자신이 주목했고 특유의 양식으로 화면에서 재생해낸 이 현상을 관람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전시장 귀퉁이에 창문을 설치했다. 간유리 너머에서 점멸하는 조명이 남긴 하얀 문양은 작가가 빛 그림자를 보이는 대로 그렸다는 것을 알려준다.
신준민의 빛 재현은 주로 두 가지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하나는 추상적 패턴이고 다른 하나는 나무 연작이다. 추상적 패턴은 주로 유리창에 비친 빛의 잔영을 그린 것이다. 작가는 처음으로 세상에 내보인 대형
< 빛 꽃 >과 색면화처럼 보이는 < 빛 꽃 > 외에도 일곱 점의 빛 그림자 스케치를 전시했다. 스케치의 활달한 붓질은 그 역동성으로 인해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짐작할 수 있듯 이 습작들은 유리창에 아롱거리는 빛 그림자와 자연적⋅인공적 빛을 반사하는 나무가 창에 비친 모습을 그린 것이다. < 바람나무 >와 < 구름나무 >라고 명명된 일련의 나무 연작에서도 화가의 시선은 여전히 빛을 향한다. 2023년에 제작한 대형 유화 < 바람나무 >에서는 빛을 점 또는 작은 면으로 발랄하게 표현했다. 이번에 선보이는
< 바람나무 >에서는 휘몰아치는 바람을 연상시키는 굵고 힘 있는 선이 빛을 재현하는 주요 요소가 되고 있다. 앞에서 신준민이 “표현주의적 재현에서 인상주의적 표현으로 옮겨 간 것 같다“고 언급한 것은 그의 근작에서 발견되는 다면적인 회화 실험에서 기인했다. 표현주의적 재현이나 인상주의적 표현이 다를 게 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하지만 미술가에게 재현 행위와 표현 행위는 엄연히 구분된다. 신준민처럼 회화라는 전통적 형식을 꾸준히 지속하는 작가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10여 년 전 화가로서 커리어를 쌓기 시작할 때부터 신준민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적 풍경을 특유의 표현주의적 필치와 색채로 화면 안에 옮겨 놓았다. 그의 작업은 줄곧 특정한 메시지의 전달이기보다는 눈앞의 광경을 화폭에 옮기는, 즉 재현하는 일로 일관해 왔다. 그러다가 비교적 최근 작가가 빛을 재현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그의 작업에선 인상주의적 경향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인상주의자들을 흔히 ”빛을 그리는 화가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사실 그들이 그리고자 했던 것은 빛을 받고 있는 (또는 받지 못하는) 어떤 대상이었다. 신준민은 문자 그대로 ‘빛을 그리는’ 화가다. 물결 위에서 반짝이는 빛, 나뭇잎에서 반사되는 빛, 유리창에 잔영을 만드는 빛을 그리면서, 그는 태양의 움직임과 가로등의 점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을 것이다. 작가가 세심히 관찰한 모든 빛들은 그만의 고유한 감성을 전하는 양식으로 표현되었고, 그 중 일부가 《화이트 섀도우》전에서 소개되었다.
신준민의 작업실에 처음 갔을 때가 생각난다. 그리 좁지도 넓지도 않은 공간에 거대한 캔버스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서 감탄사를 발했었다. “이걸 다 언제 그렸냐?” 라는 우문에 그는 조용히 웃었다. 사실 내가 놀랐던 이유는 요즘처럼 매체가 다변화되고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의 구별이 어려워진 세상에서 신준민이 회화에 성실하게 매진한다는 것 자체였다. 오늘날 대중들이 미술관을 찾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그곳에서 진기한 스펙터클을 즐길 수 있다는 데 있다. 뻔한 내용의 TV드라마나 블록버스터 영화보다 건축적 규모의 설치나 초대형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영상물이 어떤 사람들에겐 (때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흥미진진한 콘텐츠로 다가가는 듯하다. 이렇게 변화하는 미술판에서 진지하게 회화 작업에 몰두하는 작가를 오랜만에 본 탓일까? 그의 초대형 캔버스들은 몹시 신선했다. 인간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최근 발견에 따르면 5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찌 생각하면 회화는 인류에게 본능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짐작컨대 다양한 매체들이 기술 발전에 따라, 트렌드의 변화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진다고 해도 회화는 꿋꿋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화면의 명도가 전보다 제법 높아졌음에도 여전히 쓸쓸함의 정서를 품고 있는 신준민의 신작을 바라보다 보니, 그림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인지 새삼
곱씹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