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그리는 풍경’
유명진, 대구미술관 큐레이터
유명진, 대구미술관 큐레이터
1. 들어가는 말
그리스 신화에서 최고의 신 제우스(Zeus)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와의 관계에서 낳은 자식이 무사(Musa) 즉 뮤즈(Muse)다. 뮤즈는 예술의 여신, 한명이 아닌 9명의 자매로 예술과 학문을 관장하는 신이다. 예술을 관장하는 신이 전지전능한 제우스와 기억의 신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점이 흥미롭다. 필연 무한한 가능성과 정신영역을 관장하는 것이 예술인 셈이다. 그래서 예술은 시각예술이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들을 다루고 있고 특별히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닌가.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 가시적인 것들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을 우리는 예술가라 부른다. 그들은 의미 없어 보이는 단순한 대상 혹은 사물을 통해 신랄하게 사회를 비판하거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상황에 또 다른 의미심장함을 던지며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는 희한한 능력을 가졌다. 가령 얼굴 없는 화가로 알려진 뱅크시(Banksy)가 정치, 사회적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자본주의의 미술시장을 직접적으로 조롱하며 그리는 벽화들이나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1882-1967)의 ‘밤의 사람들(Nighthawks)’ 작품에서처럼 평범한 도시풍경에서 아름답지만 인간의 고독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처럼.
그리스 신화에서 최고의 신 제우스(Zeus)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와의 관계에서 낳은 자식이 무사(Musa) 즉 뮤즈(Muse)다. 뮤즈는 예술의 여신, 한명이 아닌 9명의 자매로 예술과 학문을 관장하는 신이다. 예술을 관장하는 신이 전지전능한 제우스와 기억의 신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점이 흥미롭다. 필연 무한한 가능성과 정신영역을 관장하는 것이 예술인 셈이다. 그래서 예술은 시각예술이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들을 다루고 있고 특별히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닌가.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 가시적인 것들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을 우리는 예술가라 부른다. 그들은 의미 없어 보이는 단순한 대상 혹은 사물을 통해 신랄하게 사회를 비판하거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상황에 또 다른 의미심장함을 던지며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는 희한한 능력을 가졌다. 가령 얼굴 없는 화가로 알려진 뱅크시(Banksy)가 정치, 사회적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자본주의의 미술시장을 직접적으로 조롱하며 그리는 벽화들이나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1882-1967)의 ‘밤의 사람들(Nighthawks)’ 작품에서처럼 평범한 도시풍경에서 아름답지만 인간의 고독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처럼.
사물을 단순히 바라보는 것에 그치는 것은 예술에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예술은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과 표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 소위 인간 내면의 잠재의식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2. 상징적 공간의 양면성
경제적 발전과 과학기술의 발달은 자연을 걷어내고 인위적인 것들로 새롭게 채워나간다. 또 그것들은 반복적으로 인간의 필요에 의해 소멸, 생성을 반복하며 변화 해 가고 있다. 작가는 그 중에서 변화하는 공간과 환경에 관심을 가진다. 그가 흥미롭게 바라보고 관찰하는 공간들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모습이 바뀌는 곳들, 자연공간이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곳들이다. 그곳은 인간의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들이기 때문에 시시각각 그 목적에 따라 변화하고 있고 작가는 부지런히도 이런 대중들이 붐비는 공공장소를 관찰하며 개발과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파괴되고 소외된 공간의 양면성을 발견한다. 인간의 이기심이 파괴하고 있는 자연과 인간을 제외한 다른 존재들의 모습에서 작가는 시공간의 전환 혹은 입장전환 등으로 그 이면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발견한 것을 작품으로 보여주고 있다. 단시간에는 알 수 없는 공간의 변화를 찾으려 애쓰기 때문에 오랜 기간을 두고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스케치를 하고, 다시 찾아가서 확인하며 기억속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복합적으로 표현 해 내고 있는 듯하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동물원과 야구장을 주로 관찰하며 기억 속의 공간과 현재의 공간이 중첩되는 묘한 접점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는 활기찬 생명력이 사라진 공허한 동물원과 무기력한 동물들, 관객의 함성이 사라지고 스포트라이트가 꺼진 텅 빈 경기장에서 느끼는 공간의 이중적인 모습을 그린 풍경 속에서 인간중심으로 형성 된 경계의 구분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며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경제적 발전과 과학기술의 발달은 자연을 걷어내고 인위적인 것들로 새롭게 채워나간다. 또 그것들은 반복적으로 인간의 필요에 의해 소멸, 생성을 반복하며 변화 해 가고 있다. 작가는 그 중에서 변화하는 공간과 환경에 관심을 가진다. 그가 흥미롭게 바라보고 관찰하는 공간들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모습이 바뀌는 곳들, 자연공간이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곳들이다. 그곳은 인간의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들이기 때문에 시시각각 그 목적에 따라 변화하고 있고 작가는 부지런히도 이런 대중들이 붐비는 공공장소를 관찰하며 개발과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파괴되고 소외된 공간의 양면성을 발견한다. 인간의 이기심이 파괴하고 있는 자연과 인간을 제외한 다른 존재들의 모습에서 작가는 시공간의 전환 혹은 입장전환 등으로 그 이면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발견한 것을 작품으로 보여주고 있다. 단시간에는 알 수 없는 공간의 변화를 찾으려 애쓰기 때문에 오랜 기간을 두고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스케치를 하고, 다시 찾아가서 확인하며 기억속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복합적으로 표현 해 내고 있는 듯하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동물원과 야구장을 주로 관찰하며 기억 속의 공간과 현재의 공간이 중첩되는 묘한 접점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는 활기찬 생명력이 사라진 공허한 동물원과 무기력한 동물들, 관객의 함성이 사라지고 스포트라이트가 꺼진 텅 빈 경기장에서 느끼는 공간의 이중적인 모습을 그린 풍경 속에서 인간중심으로 형성 된 경계의 구분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며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사라져간 것들-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추억 혹은 현대인의 획일화 된 모습에서 사라져 가는 인간성-변화하는 것들은 비단 공간의 변화뿐만이 아닐 것이다. 발전하는 기계문명 속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호소이며 진실의 이면에 숨겨진 다른 모습들에 대한 이야기다.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사는 현대인, 사라지는 인간의 개성과 군중심리에 의해 좌우되는 인간의 나약한 개인적 주체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그 이면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느끼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고 느끼고 있는 이런 일상의 현실 속에서 특별한 관찰력에 더하여 그것에 관한 사색과 고독의 시간이 예술가를 만든다. 그는 일상에서 변화하는 공간을 선택하고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사물과 공간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대상을 끈질긴 인내력으로 관찰하고 진지하게 살펴본다. 예술가의 눈으로 사색하고 그것으로부터 인간사회의 나르시시즘(Narcissism)을 시사한다. 모든 것이 인간 중심으로 이루어진 가시적인 세계 속에 자신을 세우고 그 속에서 실재적인 것보다 내면과 본질에 충실하게 집중하며 탐색한다. 있던 것과 사라지는 것, 그리고 새로 생기는 것, 이것은 현대 도시의 일상이다. 오늘 날 도시는 매일 새롭게 생성되는 경제적, 정치적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는데 작가는 이것을 "철 구조물로 이루어진 도시의 숲"이라고 명명한다. 변해가는 도시를 그린 자연스런 모습에 대한 작가의 웅변적 상징의 표현이다. 작가는 도시의 모습을 보이는 대상 그 자체로 만족할 수 없었고 일상의 공간을 자연본성으로 전화시킨다. 무의미했던 대상을 선택하고 깊숙이 관찰하며 그의 감성을 불어넣는다.
그의 그림은 형식적으로는 풍경화다. 그러나 현실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수집하고 편집하여 재탄생한 상상의 풍경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보이는 그대로의 풍경처럼 보이지만 오묘하게 구성된 구도와 색감은 쓸쓸함과 적막감, 그리고 섬뜩한 공포마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기억 속의 공간과 현재의 공간을 중첩시키며 그 사이의 간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주요한 모티브를 재구성하였고 작품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사고의 연상 작용은 시작된다.
3. 외부적 현상과 내적의미의 확장
시간은 늘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시간과 함께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일상이다. 이 일상은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이고 작가는 이 현실세계에 대해 사색하고 고민하여 무언가를 찾아냈고 우리에게 비가시적 세계를 가시화하여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대상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비가시적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그가 동물원에 갇힌 동물이 주체가 되고 인간이 오히려 현실세계에 갇혀있는 것이라고 설정한 것처럼 인간이 만들어 낸 경계의 정의를 전복시키며 시사하고 있는 비가시적 사고의 확장이 그러하다. 작가가 안타까워하는 현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착,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일종의 트라우마(trauma)가 되어 내적 자아에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내적 갈등을 그림을 통해 해소하는, 가령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86-1888)의 자화상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가 느꼈을 심적 불안에 대한 자기 치료의 무의식적 형식이자 자신의 광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처럼, 그림을 보며 그 속에서 동질감과 위로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시간은 늘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시간과 함께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일상이다. 이 일상은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이고 작가는 이 현실세계에 대해 사색하고 고민하여 무언가를 찾아냈고 우리에게 비가시적 세계를 가시화하여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대상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비가시적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그가 동물원에 갇힌 동물이 주체가 되고 인간이 오히려 현실세계에 갇혀있는 것이라고 설정한 것처럼 인간이 만들어 낸 경계의 정의를 전복시키며 시사하고 있는 비가시적 사고의 확장이 그러하다. 작가가 안타까워하는 현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착,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일종의 트라우마(trauma)가 되어 내적 자아에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내적 갈등을 그림을 통해 해소하는, 가령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86-1888)의 자화상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가 느꼈을 심적 불안에 대한 자기 치료의 무의식적 형식이자 자신의 광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처럼, 그림을 보며 그 속에서 동질감과 위로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그는 푸른색의 화면을 최근에는 의도적으로 흰색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흰색의 정의에 대해 인상주의자들이 '자연 속에는 흰색이 없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흰색은 실제의 사물이 아닌 모든 것이 사라진 세계를 상징한다. 그는 곧 이전되어 사라질 동물원(달성공원)과 신축으로 변화 될 야구장(시민 운동장)을 흰색을 사용하며 향후 사라짐을 예고한다. 사라짐은 변화이고 변화는 또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된다. 그에게 사라지는 기억이 누군가에게 또 다른 기억으로 남겨질 것이고 이 기억 또한 다시 사라지는 과정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4. 소리 없는 아우성
그림 속에 사람이 없다. 많은 인파가 모여드는 공공장소를 그리고 있지만 그림 안에는 정작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적막감과 쓸쓸함이 느껴지는 그의 풍경은 단순히 보기에는 조용하고 황량한 풍경화에 지나지 않지만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깊은 의미의 메시지가 보인다. 유치환(柳致環) 시인이 쓴 ‘깃발‘(1939,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에 수록)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구절처럼 언어에서 역설적인 표현이 있듯이 신준민은 회화에서 이 방법을 사용한다. 그는 겉으로 드러내 표현하지 않았고 그림 속에는 적막하고 공허한 빈 공간만을 보여준다. 신준민이 그리는 이런 모순된 장소의 표현은 그 안에 숨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향한 호소, 즉 ‘인간성(humanity)’에 대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 그것은 비단 변화되는 도시의 공간과 그것과 함께한 기억의 상실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사라져 가는 인간의 온정에 가슴아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거친 붓질과 슬픈 색채는 작가의 심경을 대변하듯 깊고 어둡다. 풍경을 그리고 있으나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며 형태를 드러내 보이지 않음으로써 은밀하고 조용하게 그 존재를 더욱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림 속에 사람이 없다. 많은 인파가 모여드는 공공장소를 그리고 있지만 그림 안에는 정작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적막감과 쓸쓸함이 느껴지는 그의 풍경은 단순히 보기에는 조용하고 황량한 풍경화에 지나지 않지만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깊은 의미의 메시지가 보인다. 유치환(柳致環) 시인이 쓴 ‘깃발‘(1939,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에 수록)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구절처럼 언어에서 역설적인 표현이 있듯이 신준민은 회화에서 이 방법을 사용한다. 그는 겉으로 드러내 표현하지 않았고 그림 속에는 적막하고 공허한 빈 공간만을 보여준다. 신준민이 그리는 이런 모순된 장소의 표현은 그 안에 숨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향한 호소, 즉 ‘인간성(humanity)’에 대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 그것은 비단 변화되는 도시의 공간과 그것과 함께한 기억의 상실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사라져 가는 인간의 온정에 가슴아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거친 붓질과 슬픈 색채는 작가의 심경을 대변하듯 깊고 어둡다. 풍경을 그리고 있으나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며 형태를 드러내 보이지 않음으로써 은밀하고 조용하게 그 존재를 더욱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5. 나오는 말
시간의 흐름을 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기록, 인간의 기억은 기록으로 남는다. 신준민은 ‘기억, 혹은 추억’ 이라고 하는 인간적인 감성을 매개체로 지워질 수 있는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을 붙들고자 한다. 그러나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본질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 낸 사회 현상들과 그 안에서 결국 잃어가고 있는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다. 예술가는 무언가를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형태와 표현방법이 적합하게 형성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예술이라 부른다. 작가가 느끼는 안타까움과 슬픔 등의 감정은 이미 화면 안에 색채와 구성, 그리고 복잡한 붓질들로 충분히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시간의 반복, 생성과 소멸, 현대사회의 변화 이런 사회 현상에 대해 깊이 관조하고 그 안에서 도출 해 낼 수 있는 인간사회의 모순들을 슬그머니 끄집어내어 화면 안에 숨겨놓았다. “자, 보십시오. 이 안에 무엇이 보입니까?” 작가는 단순한 정신노동의 결과물로서가 아니라 관객에게 호소하며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 또한 작가는 그림을 통해 본인의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는 연약하고 섬세한 아픔을 위로한다.
시간의 흐름을 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기록, 인간의 기억은 기록으로 남는다. 신준민은 ‘기억, 혹은 추억’ 이라고 하는 인간적인 감성을 매개체로 지워질 수 있는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을 붙들고자 한다. 그러나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본질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 낸 사회 현상들과 그 안에서 결국 잃어가고 있는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다. 예술가는 무언가를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형태와 표현방법이 적합하게 형성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예술이라 부른다. 작가가 느끼는 안타까움과 슬픔 등의 감정은 이미 화면 안에 색채와 구성, 그리고 복잡한 붓질들로 충분히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시간의 반복, 생성과 소멸, 현대사회의 변화 이런 사회 현상에 대해 깊이 관조하고 그 안에서 도출 해 낼 수 있는 인간사회의 모순들을 슬그머니 끄집어내어 화면 안에 숨겨놓았다. “자, 보십시오. 이 안에 무엇이 보입니까?” 작가는 단순한 정신노동의 결과물로서가 아니라 관객에게 호소하며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 또한 작가는 그림을 통해 본인의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는 연약하고 섬세한 아픔을 위로한다.
생기발랄한 청년의 눈으로 바라보는 ‘도시의 숲’의 모습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고 확장되어 갈 지 기대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