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와 ‘백색’의 그림자
김옥렬(현대미술연구소/아트스페이스펄)
김옥렬(현대미술연구소/아트스페이스펄)
1.
그림은 시대와 문화를 떠나 독립적인 대상인 그 자체만으로 감상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림의 의미는 작가와의 연관성 속에서 그 의미가 품고 있는 것을 알 때 보다 생생하게 창작과 감상의 관계가 살아난다. 그 이유는 화폭에 그려진 그림은 작가의 시지각적 경험의 확장이자 자의식을 표현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신준민은 유년시절의 시지각적 체험을 즐거운 한 때, 혹은 행복한 순간의 기억이 성인이 된 지금, 쓸쓸함 혹은 우울한 감성에 자의식을 담아 창작의 에너지로 승화해 나가고 있다.
그림은 시대와 문화를 떠나 독립적인 대상인 그 자체만으로 감상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림의 의미는 작가와의 연관성 속에서 그 의미가 품고 있는 것을 알 때 보다 생생하게 창작과 감상의 관계가 살아난다. 그 이유는 화폭에 그려진 그림은 작가의 시지각적 경험의 확장이자 자의식을 표현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신준민은 유년시절의 시지각적 체험을 즐거운 한 때, 혹은 행복한 순간의 기억이 성인이 된 지금, 쓸쓸함 혹은 우울한 감성에 자의식을 담아 창작의 에너지로 승화해 나가고 있다.
승화(Sublimation)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의미가 성적인 충동이 원래의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전향되는, 그럼으로써 성적 충동의 주체가 스스로 사회적이거나 종교적인 혹은 도덕적 규범들에 순응하는 과정(대개는 무의식적인)을 의미한다거나, 외과수술이 폭력적 충동의 승화라면 운동경기가 공격적인 충동의 승화이고, 예술작품은 승화된 리비도의 재현(문학비평용어사전)이라고 본다면, 놀이터, 동물원, 야구장을 주제로 한 신준민의 그림은 승화된 리비도의 재현이 수동적인 충동이든 능동적인 충동이든지 그 어떤 공격적 충동이 투영된 그림일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이 회화적 방식으로 드러나는 충동으로 과거의 행복과 현재의 슬픔이 결합되면서 근원적 욕망의 승화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승화는 욕망의 주체로 하여금 내적인 갈등으로 야기된 긴장을 완화하고 무의식적인 욕망을 간접적으로 충족하게 하며, 무엇보다 초자아와의 불화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욕망의 주체로 하여금 사라진 평정상태를 회복하고 사회적 환경과의 조화 속에 존재할 수 있게 하는 효과적인 방어 메커니즘이 바로 승화라는 점에서 신준민의 작품이 품고 있는 것은 과거의 행복과 현재의 슬픔이 주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욕망의 투영이 내재해 있다. 그 무의식적 욕망에는 과거의 행복을 통해 심연의 슬픔과도 대면하는 현재의 충동이 바로 창작의 에너지가 되고 있음이다.
이렇듯 신준민의 페인팅은 과거를 현재라는 장소에서, 주체가 그림을 통해서, 본질이 표현으로, 슬픔이 회화적 지우기에 의해서 새롭게 드러나고 또 지워지는 과정을 거쳐 슬픔은 블루로 그 블루의 그림자는 검은색을 품은 백색으로 승화되어 간다. 이처럼 신준민의 그림은 자신의 근원적 욕망이 자리한 시지각적 체험을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감성이 겹쳐지는 과정에 있다. 바로 이런 감성의 연결고리는 놀이터에서 동물원 그리고 야구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주제의 일차적인 선택은 보거나 만질 수 없는, 감각적 체험 너머의 시간을 반추하는 것이자, 시각적 체험의 비전 즉, 환시(幻視)의 자기표현이다.
2.
신준민의 그림을 지배하는 색은 ‘블루’다. 그의 그림에서 ‘블루’가 갖는 의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했던 행복한 순간에 대한 기억, 그 기억이 담긴 장소, 그 장소에 대한 기억을 반추하는 현재의 시선이다. 이 시선은 ‘블루’, 신준민의 블루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를 잇는 ‘백색’의 역설이 담겨있다. 그것은 ‘동물원’의 원숭이나 고릴라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으로 현재의 삶에서 느끼는 그리움의 깊이를 동물원의 동물을 통해 투영한다. 유년시절 즐거운 추억이 지금은 퇴색된 사진처럼 희미한 잔상이지만, 유년시절의 뼈와 살에 스민 가족과의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은 몸과 기억에 또렷한 영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 기억을 찾아간 현재의 황량한 동물원, 지나간 추억과 현재의 시간이 겹쳐지는 시공간의 층위를 신준민은 ‘블루’로 표현했다.
신준민의 그림을 지배하는 색은 ‘블루’다. 그의 그림에서 ‘블루’가 갖는 의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했던 행복한 순간에 대한 기억, 그 기억이 담긴 장소, 그 장소에 대한 기억을 반추하는 현재의 시선이다. 이 시선은 ‘블루’, 신준민의 블루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를 잇는 ‘백색’의 역설이 담겨있다. 그것은 ‘동물원’의 원숭이나 고릴라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으로 현재의 삶에서 느끼는 그리움의 깊이를 동물원의 동물을 통해 투영한다. 유년시절 즐거운 추억이 지금은 퇴색된 사진처럼 희미한 잔상이지만, 유년시절의 뼈와 살에 스민 가족과의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은 몸과 기억에 또렷한 영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 기억을 찾아간 현재의 황량한 동물원, 지나간 추억과 현재의 시간이 겹쳐지는 시공간의 층위를 신준민은 ‘블루’로 표현했다.
현재 신준민이 몰두하는 그림인 ‘야구장’은 과거를 반추하는 현재의 시선이 아버지와 함께 했던 유년시절의 행복한 순간과 스스로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아버지의 부재(현재,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지만 스스로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자각)인 현재가 결합되는 지점이다. 과거와 현재, 행복과 슬픔이라는 두 가지의 계기가 결합되는 지점은 개인과 시대적 우울감이 겹치는 장소이다. 그것은 작가로 살아가야하는 현실적 삶, 작가로서의 꿈과 희망으로만 살아가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깊은 침잠, 그것은 과거, 즉 유년시절에 가졌던 행복의 박탈감이자 아버지의 부재이고 이제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현실 앞에서 바라보는 지금의 현실이 투영된 장소가 된다. 아버지와 결합된 과거의 부재는 아버지가 되지 못하는 현실이 드러나는 방식, 즉 텅 빈 경기장이자 불이 꺼지고 검게 멈추어 있는 전광판일 것이다.
3.
신준민의 페인팅은 화면을 장악하는 회화적 기법이나 색과 형의 관계가 시간과 공간의 상황적 의미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그것은 물감의 농도 조절을 통해 획을 긋다가도 흘러내리기와 문질러 긋는 붓질의 연속과 불연속의 터치로 화면의 시공간을 조절해 간다. 그것은 마치 몸이 붓을 타고 동물원의 원숭이와 고릴라를 만나고, 경기장에 가서는 붓을 타고 뛰거나 걷다가 한 순간 깊은 침묵으로 응시하는 시선이 된다.
신준민의 페인팅은 화면을 장악하는 회화적 기법이나 색과 형의 관계가 시간과 공간의 상황적 의미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그것은 물감의 농도 조절을 통해 획을 긋다가도 흘러내리기와 문질러 긋는 붓질의 연속과 불연속의 터치로 화면의 시공간을 조절해 간다. 그것은 마치 몸이 붓을 타고 동물원의 원숭이와 고릴라를 만나고, 경기장에 가서는 붓을 타고 뛰거나 걷다가 한 순간 깊은 침묵으로 응시하는 시선이 된다.
신준민에게 있어 야구장은 아빠를 따라 경기를 보고 응원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가장 행복했던 유년의 기억이다. 야구장은 유년의 행복감과 성인이 되어 텅 빈 경기장을 보는 시선, 시간과 공간적 거리감이 행복과 슬픔으로 교차하는 장소이다. 관중으로 가득 차 보이는 야구장조차 텅 빈 것처럼, 고요와 적막한 분위기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어쩌면 관중들로 가득한 경기장이거나 텅 빈 경기장 그리고 불꽃이 터지는 전광판과 불이 꺼진 전광판의 대조는 다른 것 같지만 다르지 않은 부재의 슬픔이라는 과거의 투영에서 동일한 선상에 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자크 라캉)는 말처럼, 신준민의 부재에는 존재가 전제된다. 그것은 슬픔과 우울을 창작의 에너지로 만들어 가는 그의 미의식이 보이지 않는 시공간을 시각화하는 그만의 회화적 방식을 온몸으로 터득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과 몸의 관계에서 작가는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을 구체적인 장소를 통해 백색의 그림자인 블루를 찾아 슬픔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실천하는 여행을 하고 있다.
자신의 감정에 몰입해서 그것을 화면 속에 쏟아 내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이 젊은 작가는 야성미가 사라진 동물원과 텅 빈 야구장의 적막함 사이에서 존재에 대한 사유를 한다. 그의 사유는 확실히 붓을 타고 몸으로 보여주는 사유이다. 이 붓의 사유가 슬픔을 승화시키는 희열의 장이고, 그것은 마치 우울한 기쁨이자 밝은 그림자에 대한 역설로 그림자의 실체를 바라보는 신준민의 페인팅이 주는 힘이다.